
아기가 태어나서 한동안은 장난감을 잡고 흔들어보고, 입에 넣어보고, 버튼을 누르면서 세상을 알아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방법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가지고 노는 것을 넘어 무언가를 흉내 내고, 엄마아빠가 했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기도 17~18개월쯤부터 자연스럽게 역할놀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채소를 심는 놀이, 아이스크림 가게 놀이처럼 단순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두돌이 지나고 나니 병원놀이에 푹 빠졌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감을 주고받는 정도였는데, 놀이를 반복할수록 아이가 하는 말도 많아지고 상황을 만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그때부터 역할놀이가 단순히 귀여운 놀이가 아니라 아이에게는 세상을 배우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기, 어느 순간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두돌 전까지 아이의 놀이는 대부분 눈앞에 있는 물건을 직접 탐색하는 데 가까웠다. 컵을 보면 잡아보고 뒤집어보고, 블록을 보면 쌓아보고 무너뜨리는 식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같은 컵을 가지고도 전혀 다른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컵을 입에 대고 물을 마시는 척하고, 엄마에게 건네면서 먹으라고 하기도 했다. 인형을 눕혀놓고 이불을 덮어주거나 장난감 음식으로 밥을 먹이는 모습도 보였다.
이런 변화가 바로 상징놀이와 역할놀이가 시작되는 모습이다. AAP에서도 두돌 무렵 아이들이 상징적 사고가 발달하면서 실제 물건이 아닌 다른 것을 마치 다른 대상으로 생각하는 가상놀이가 가능해진다고 설명한다. 바나나를 전화기처럼 사용하거나 블록을 음식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눈앞에 있는 사물을 실제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는 것 자체가 상상력의 시작인 셈이다.
우리 아기도 17~18개월쯤부터 이런 놀이가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처음에는 채소를 심는 놀이를 했다. 작은 장난감을 가지고 땅에 심는 시늉을 하고 다시 꺼내는 단순한 놀이였다. 또 아이스크림 가게 놀이를 하면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엄마아빠에게 건네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그냥 귀여워서 같이 놀아주는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놀이가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끝났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 먹어”, “아빠 먹어” 하면서 누구에게 줄지 정하기 시작했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기도 하고, 아빠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이야기하기도 했다. 가게에 들어가면 “어서오세요~”라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단순히 장난감을 움직이던 놀이가 어느새 하나의 상황이 되고, 그 안에 등장인물과 이야기가 생기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이의 상상력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장난감이 없어도 컵 하나, 인형 하나, 블록 몇 개만 있으면 아이는 자기 경험을 가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부모 입장에서는 똑같은 놀이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여도 아이에게는 그 반복 속에서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보고 세상을 다시 경험해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2. 역할놀이를 하면서 말이 늘고 놀이의 세계도 넓어졌다
역할놀이를 하면서 가장 눈에 띄었던 변화 중 하나는 아이가 사용하는 말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역할놀이에는 자연스럽게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많았다.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주려면 “먹어”라고 해야 하고, 손님이 들어오면 “어서오세요”라고 해야 했다.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맛있어?”라고 묻기도 하고, 아빠에게 다른 맛을 주면서 서로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한두 단어로 끝나던 말이 놀이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길어졌다. 역할놀이 안에서는 아이가 말할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단어를 외우라고 시키는 것보다 실제 상황 속에서 필요한 말을 사용하는 경험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주방놀이를 하면서 “먹어”, “더 줘”, “다 됐어” 같은 말을 하고, 병원놀이를 하면서 “아파?”, “약 먹자”, “괜찮아”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식이다.
두돌 무렵에는 상징놀이와 언어가 함께 발달하면서 이런 경험이 더 많아진다. 아이는 놀이 속에서 사물의 이름뿐 아니라 행동과 감정, 상황을 표현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다. 그래서 역할놀이는 언어를 따로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라 아이가 언어를 사용할 필요를 느끼게 해주는 놀이가 될 수 있다.
우리 아기도 처음에는 단순하게 주고받는 놀이만 했다. 그런데 같은 놀이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점점 놀이의 구성을 스스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엄마 먹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먹고, 아빠는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이야기하고, 가게에 들어오면 인사를 하고, 다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주는 식이었다.
특히 지금 가장 좋아하는 병원놀이는 놀이 속에서 배우는 것이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되어 체온을 재고, 청진기를 대고,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는 행동을 반복했다. 엄마가 아픈 환자가 되기도 하고 아이가 의사가 되기도 하면서 역할도 바꿔봤다.
그런데 역할놀이의 힘을 제대로 느낀 것은 실제 병원에 갔을 때였다. 예전의 우리 아기는 병원만 가면 정말 뒤집어지게 울었다. 체온을 재는 것부터 싫어했고, 청진기를 대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런데 병원놀이를 몇 번 하고 난 뒤 실제 병원에 갔더니 달라진 모습이 보였다. 놀이에서 해봤던 체온계와 청진기를 실제로 사용하니까 예전처럼 크게 울지 않고 비교적 잘 견뎌냈다.
그때 역할놀이가 단순히 언어를 늘리고 상상력을 키우는 놀이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아이에게 낯설고 무서운 상황을 놀이로 먼저 경험하게 해주고, 그 상황을 자기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부모에게는 지루한 반복놀이, 아이에게는 세상을 넓히는 시간
솔직히 말하면 아기와 역할놀이를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끔은 정말 지루할 때도 있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었다가 문을 닫고, 다시 열었다가 또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주고, 병원놀이를 시작하면 체온을 재고 청진기를 대고 약을 먹이는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어른 입장에서는 “아까 했던 거 또 하는데?” 싶은데 아이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이에게는 같은 놀이도 매번 조금씩 다른 경험이 되는 모양이다. 오늘은 엄마가 환자가 되고 내일은 아빠가 환자가 되고, 인형이 환자가 되기도 한다. 어제는 체온만 쟀다면 오늘은 청진기를 사용하고, 그다음에는 약까지 먹인다.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조금씩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역할놀이는 꼭 비싼 장난감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컵이나 접시, 냄비, 상자, 블록, 인형처럼 주변에 있는 단순한 물건만으로도 충분하다. 오히려 정해진 기능이 적은 물건이 아이의 상상력을 더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블록 하나를 음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상자를 자동차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인형에게 밥을 먹이고 재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역할놀이가 된다.
부모가 해야 할 일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이가 “엄마 먹어”라고 하면 같이 먹어주고, “아기 자”라고 하면 “아기가 졸렸나 봐. 코 자자”라고 받아주는 정도면 충분했다. 아이가 만들어가는 놀이에 부모가 조금씩 말을 보태주면 자연스럽게 놀이가 확장됐다.
무엇보다 아이가 주도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했다. 엄마가 생각한 방식대로 놀게 하려고 하기보다 아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바라보는 것. 인형에게 자동차를 태우든, 블록으로 밥을 만들든, 컵으로 전화를 하든 “그건 아니야”라고 정답을 정해주지 않는 것. 그런 자유로운 놀이 속에서 아이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돌이켜보면 우리 아기의 역할놀이도 처음부터 특별했던 것은 아니다. 채소를 심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주던 단순한 놀이가 어느새 대화가 되고, 역할이 생기고, 이야기가 생겼다. 그리고 병원놀이는 실제 병원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 덜어주는 경험까지 만들어줬다.
어른에게는 반복적이고 조금 지루한 놀이일 수 있지만, 아이에게는 그 시간이 세상을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오늘도 똑같은 병원놀이를 또 하자는 아이를 보면서 잠깐 한숨이 나오다가도, ‘이 아이는 지금 이 놀이를 통해 또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두돌 무렵부터 시작되는 역할놀이는 단순히 귀여운 행동을 넘어 아이가 경험한 세상을 다시 표현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감정을 이해하고, 새로운 상황을 상상해보는 과정인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조금 지루하더라도 아이의 눈높이에서 함께 놀아주려고 한다. 어쩌면 아이에게는 그 반복되는 놀이 하나하나가 세상을 조금씩 넓혀가는 소중한 경험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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